좋아하기./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Le Tout Nouveau Testament) - 신의 이름을 빌린 휴머니즘의 다른 말, 다른 표현

상상숲 2016. 2. 17. 17:45

이웃집에 신이 산다(Le Tout Nouveau Testament) - 신의 이름을 빌린 휴머니즘의 다른 말, 다른 표현






신의 이름을 빌린 휴머니즘의 다른 말, 다른 표현

 

 프랑스 원제 Le Tout Nouveau Testament, 영어로는 The Brand New Testament. New Testament 는 신약성서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영화이 맥락과 함께 해석해보자면 '신(新) 신약성서' 혹은 신약성서 업그레이드 아니면 개정판 신약성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건 가운데 포스터. 맨 왼쪽 포스터는 너무 미국 TV쇼 광고 느낌이 나고, 맨 오른쪽 포스터는 도대체 이 영화가 무슨 내용을 말하려 하는지 약간의 힌트라도 얻기 힘들어보여서. 포스터에 사족을 더 붙이자면, 에아가 나왔으면 더 신비로운 분위기와 함께 주인공이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주연/조연별 포스터가 따로 나와있기는 하지만서도)

 이번 리뷰는 짧게짧게. 무려 친구가 생일 선물로 보여준 영화이다! 1월달에 본 영화를 지금에서야 각 잡고 마음잡고 글로 남긴다. 취향저격해 준 친구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이웃집에 신이 산다(Le Tout Nouveau Testament) 리뷰, 시작합니다.

 (줄거리/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배우 이름과 캐릭터 이름을 혼용해서 씁니다.)


)트리비아


굳건한 성서를 바탕으로 한 인간들의 변주곡


 이 영화의 제목에도 신이 나오고(한국 한정), 포스터에 나오는 것도 창조주이지만 막상 영화에는 휴머니즘, 인본주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질질[각주:1] 흘러넘친다. 성서의 내용에 대해 알고 갔으면 좋았을텐데, 배경지식이 없어서 영화 곳곳에 녹아있는 종교적 함의(혹은 비유)를 지닌 장면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영화에서 서술되는 모든 복음의 서술자는, 인간이다. 질문보다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 서술이 모든 시나리오를 설명한다. 귀천에 상관 없이 모든 사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양한 시점에서 개개인에게 연민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스토리는 다시 한 번 이 영화가 인간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다양한 성별, 나이, 직업, 그리고 저마다 다른 환경에 처해있는 여섯 명의 인간들. 악마의 숫자라고 여겨지는 6을 오히려 더하기로 이용해서 12명의 사도가 총 18명으로 추가된다. 사도들을 모을 때 장식품으로 있는 에아의 오빠 J.C (아마가 아니라 분명 지저스 크라이스트, 즉 예수)의 조언은 덤이다.




에아, Ea



 이 사진은 꼭 넣고 싶었다! 주인공 에아 역의 필리 그로인이 정말 예쁘다. 영화로 보면 더 예쁘다. 단순히 예쁘다기보다는, 신비로우면서도 몽환스러운 느낌이 나면서도, 또 웃을 때는 순수한 아이같은 면모도 보인다.


 최근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는 취미? 흥미가 생겼다[각주:2]. 그래서 주인공 Ea의 어원을 찾아봤다. 그 중 눈에 들어온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

 the usual Old English word for "river, running water" (still in use in Lancashire, according to OED); see aqua-. "The standard word in place-names for river denoting a watercourse of greater size than a broc or a burna" [Cambridge Dictionary of English Place-Names].

 즉 에아라는 이름에는 물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수메르 신화에서는 이러한 어원과 함께 물의 신, 지혜의 신, 정화의 신인 '에아'라는 신이 존재한다고 한다(신화에서는 남신이기는 하지만). 지혜의 신인 에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에아가 난제에 대해 명확하게 해답을 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본의 아니게 그들 스스로가 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또 상대방을 끊임없이 관찰한다.


 항상 갇혀만 지내고, 창조주인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던 에아는 세탁기를 통해 바깥 세상으로 나온다. 더러워진 세탁물을 다시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세탁기, 그 세탁기를 통해서 혼란스러운 인간 세상에 도착한다. 자신의 죽음, 수명이 몇시 몇분 몇초 남았는지 알아 혼란스러운 세상에 너무나도 태연스럽게 동행을 만들고, 새로운 신약성서를 쓰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냥 저 장면을 보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좁은 세탁기 통로가 출산의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불편함과 고통을 거치고 산도를 통해(어떻게 보면 고난을 겪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가는 모습이 유아의 그것과 닮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어른은 나중에 무엇이 되나요?


 에아는 영화에서 묻는다. 아이는 커서 무엇이 되나요? 그러자 새로운 사도들이 대답한다. 어른이 된단다. 그런데, 그러면 어른은 무엇이 되나요?


 이 영화에서 충분히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은 다시 아이가 된단다. 첫 번째 사도의 손가락 피겨 장면은 기괴하면서도, 누구나 마음 속 가지고 있는 (이룰 수 없을지라도)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면서도 인생은 스케이트 장 위와 같다는 말을 다시금 상기킨다. 그리고 이 말을 고난을 딛고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서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노숙자가 했다는 점에서, 삶을 달관한 초연적인 사람의 깨달음으로써 뇌리에 박힌다.


 영화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른은 또 아이를 낳는다고. 몇몇 사람들은, 도대체 왜 모든 커플이 기승전 잠자리로 끝나는지에 대해 어이없어 할 수도 있고,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를 낳은(영화에서는 몇 번 번식이라는 적나라한 단어로 언급되었던 것 같다) 어른들에게 그들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그저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얘기를 앞으로의 인물들의 행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얘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각주:3]


 과연 어떤 어른이 되는 것이 좋을까. 그리고 어떤 아이가 되는 것이 좋을까.




인간의 삶에서 신이 필요한 의미는 말이야, ____________________?


  영화에 묘사된 창조주(이하 신神)을 보며, 우리가 믿는 신의 모습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언제든제 바뀔 수 있으면서도 실체가 없는 찰흙덩어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신이나 특정 종교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따라 신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든 다양하게 묘사될 수 있다. 많은 매체 속에서 등장하는 신은 언제나 자애로우며 기본적으로 친절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신은 따뜻하고 다정하기는 커녕 괴팍한 성질에 남의 고난을 즐기는, 심지어 머피의 법칙까지 창조한(!) 자이다. 심지어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을, 남의 성질을 긁어서 졸지에는 밀입국자 대우를 받게된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으며,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신의 모습은 다양해진다. 자신의 목적에 맞게 신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챙기는 사람들도 있고, 삶의 이정표로 신을 대하며 종교에 귀의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삶을 감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신이 어째서 필요한가? 에 대한 대답이 수백갈래의 다른 길로 뻗어져나가기 때문에 이 질문의 의미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연출에 관해서 이야기를 잠깐 하고, 남은 감상을 정리하려고 한다. 우연히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집에서 보고 온 영화가 상의원이라는 영화였는데, 아.... 연출도 그렇지만 저 같은 CG를 보면서 탄식했다. 세상에 주인공 나올 때 후광 보정도 저게 뭐지 싶었지만 달토끼... 달토끼... 그래서 극중 효과를 어떻게 주는지 이를 갈고 보다가, 이 영화에서는 조명도 그렇고 클로즈업 씬, 독백이 희극같이 이용되면서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공허와 집중 사이를 잘 잡아낸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몰라서 더 열심히 살고,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그 불확실성 때문에 신을 믿는다. 이 미래는 단순히 근시안적 미래, 몇 시간 후 며칠 후 혹은 몇 달, 몇 년 후가 될 수도 있겠지만 더 크고 먼 시점에서 보자면, 내세의 삶에 대한 불안함도 포함된다. 그런데 내게 남은 수명을 초 단위로 알게 된다면? 어쩌면 지금의 삶보다 더욱 더 과감하고, 끝을 아는 레이스이기 때문에 삶 자체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자신의 수명이 허락하는 한 어떤 기괴한 죽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케빈에게서, 세계에서 제일 많은 수명을 가진 것을 꺠닫자 방탕하게 사는 젊은이에게서, 직장을 때려치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악기 연주라든지) 다양한 군상들에게서 삶과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며, 이러한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얘기한다. 삶을 알게 되면 죽음을 알게 되고, 죽음을 알게 되면 외려 진정한 삶을 찾게 되는 것처럼. 마치 어른이 아이가 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었다 다시 아이가 되는 것 처럼.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남녀들(비단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 아니더라도; 노숙자 할아버지를 제외하면)은 모두 사랑에 빠진다. 모든 커플들의 관계에서 섹슈얼한 장면이 제시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에아와 윌리가 그렇게 예쁘고 순수한 모습을 보였던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당당하게 표현할 줄 아는(붉은색 원피스) 윌리의 솔직함에 타인에 대한 진심이라는 의미의 필리아적 사랑이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 아닌가 감히 생각해본다.

 여담으로, 이 영화에서 꽃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 같다. 엄마 신이 아끼던 꽃무늬 식탁보도 그렇고, 프랑수아가 오렐리를 보았을 때 몽글몽글 피어났던 노란 꽃도 그렇고, 마지막 장면에 온 도시에서 싱그럽게 자라나는 초목과 꽃무늬 하늘도. 인간이 자유롭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이 꽃과 닮지 않았나 싶다.


+)덧붙이는 말. 감독인 자코 반 도마엘이 영화에서 문자를 확인하고, 삶이 몇 초 밖에 남지 않았음을 의아해하다가 버스에 치어 죽는 역할(카메오)로 나왔다. 알고 보면 재미있을수도[각주:4]




)오/탈자 수정은 추후에.

  1. 종이에 쓸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옮기면서 보니까 질질이라는 표현이 웬지 질 낮아보인다... [본문으로]
  2. 여담으로 관심있는 사람들은 http://www.etymonline.com/ 이 사이트를 참고하세요 [본문으로]
  3.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제일 많이 시간을 들이고 고친 문장인데, 역시나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본문으로]
  4. Director Jaco Van Dormael has a cameo as the man who is killed by a bus after getting the message that he has only seconds to live.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