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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라이더, 2017/ 정말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 ★★★★

상상숲 2017. 8. 8. 11:54

싱글라이더 (2017), 이주영 감독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3.7 / 5
정말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


 점수를 주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치 공효진 배우의 한 마디처럼 깔끔한 단편 소설을 한 편 본 느낌이다. 호주의 찬란한 풍경이 펼쳐지는데도 영화는 건조하다. 햇살도, 바다도 빛나고 있는데 느껴지는건 쓸쓸함과 외로움이다. 연기를 이끌어가는 이병헌의 (악마의) 재능이 스크린과 영화를 끌어간다. 대사가 많이 없는 만큼 눈동자의 움직임과 표정 같은 것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대사가 아닌 행동을 통해 인물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 어려운 걸 잘 해냈지 말입니다...
 처음에 영화를 보면서 설정 구멍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중에 반전을 알아챘을 쯤 뒤통수를 때린다. 이상하네? 영화라서 그런거겠지 뭐, 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치밀한 복선이었다.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나중에 결말을 암시하는 큰 하나의 단서가 된다는 점은 대단하다. 불쌍한 치치ㅠㅠㅠ


 영화의 초반 부에 고은 시인의 시가 나온다. 내려갈 때 보이는 것들,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흔히 인생을 언덕길에 비교한다.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성공과 실패라는 대조적인 비유로 쓰이지만서도, 내려가면서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꽃 한 송이를 '되'돌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내리막길이 마냥 부정적인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적막함과 쓸쓸함, 고독과 우울을 강조하기 위해 이병헌이 혼자 나오는 장면에는 최소한의 소리만이 사용된다. 하지만 그 고독이 완전한 적막으로 표현하지 않고 시트가 사부작거리는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발걸음 소리를 크게 해 소리로 빈 공간을 채우는 느낌이 든다. 광고 감독님이 영화로 오셔서 그런지 집 안에 있을 때와 집 밖 풍경을 잡을 때의 색감, 영상미가 정말 예쁘다. 

 남부럽지 않은 수입에, 능력있는 아내와 아들을 둔 남편이지만 그의 일상에 초점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 오히려 영화를 현실적으로 만든다. 전체적으로 높낮이의 변화가 크게 없는 영화다.
 호주로 출발할 때부터 이병헌은 안경을 벗는다. 정확하리라 믿었던 숫자들도 사실은 다 믿지 못할 쓰레기 더미였고, 사진과 동영상으로만 보는 아내와 아들의 삶은 단면적이다.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봐야 할 것을 확실히 알고 떠나는 이의 눈에는 목표와 초점이 생긴다. 자신이 곧이 곧대로 보는 그 모든 장면들이 사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안경이 필요 없었던게 아닐까.

 다만 길게 보여줄 부분은 짧게 보여주고, 짧게 보여줄 부분은 길게 보여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도 또다른 아쉬운 점이다. 사실 아직도 공효진이 이민서류를 준비할 때 배우자 칸에 이병헌을 적었는데, 정말로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나서 찾아보니까 어떤 사람은 그 칸이 비워져 있었다고 하고 여러모로 말이 많다. 
 영화를 보면서 이병헌의 심리도 그렇지만, 공효진의 심리도 궁금했다. 낯선 땅에 자신이 오롯이 책임져야 할 아들과 단 둘이 떨어져 생활을 시작할 때의 막막함, 공포, 원망과 애정 등등을.


 번외로 안소희의 연기라고 해야 하나 설정이... 호주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매일 새벽 농장에서 일했다는 사람이, 연출 탓인지 분장 탓인지 삶에 치인 학생이라기보다는 광고에 나올 것 같은 청춘 여행객같은 이미지로 나온다. 웬만해서는 영화나 드라마 볼 때 한 역할에 다른 배우 생각 잘 안 하는데 여기는 예외였다. 나름 이병헌이 죽은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장치로 등장한 것 같긴 한데 그렇기에는 너무 분위기를 너무.... 많이.... 끊었다.

 정리하려고 쓴 글이었는데 정리는 커녕 오히려 더 뒤죽박죽이라 글이 더러워진 느낌이다. 여튼 마지막 장면까지 인상깊었다. 아들이 보내줬던 동영상 속의 바닷가를 가면서, 파도가 치는 '절벽' 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을 점점 줌아웃해서 멀리 잡는데 영화를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벼랑 끝에 내몰려서 선택한 자살이지만 이제 마음을 놓고 저 멀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이전과는 다르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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