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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숲
지킬 앤 하이드 :: 소금, 그리고 본능 등등. 본문
C&C 지킬과 하이드 발췌된 부분을 읽고 든 생각.
마지막 부분의 지킬 박사의 사건 설명이었던 것 같다.
출처가 없는 부분을 제외하면 지극히 개인의 의견이며, 사실관계에 있어서 틀린 부분이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1차 작성. 검토X 2015.12.19~20
)2차 수정. 2015.12.21.
(출처)
'그'라고 말하는 것은 '나'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네.
지킬은 끝까지 하이드를 '나'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 '하이드는 ~', 혹은 열등하고 사악한 존재로 칭하는 대명사로 그를 묘사한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 하는 것일까?
어린 아이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욕구를 나타낼 때 '나'라는 명사를 쓸 때도 있으나, 'X는~' 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타자화하며 얘기할 때가 많다. 누군가는 귀여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하나, 이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어느 정도 사회화 된 사람들은 자신의 솔직한 욕구를 타인에게 말하는데 어느 정도의 거리낌을 느낀다. 가령 '실례합니다', '죄송하지만', 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욕구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거나, 심하게는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데 반대급부가 있으며,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칭하는 '나'라는 호칭보다는, 나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자신을 타자화시켜 미안함과 죄책감에서 'X는~' 이라는 표현을 쓰는것이다.
한편 자신의 욕구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인지를 1차적으로 판단하고, 설령 이런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 해도 그 지름길이 부도덕하거나 반사회적이면,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레 억눌리게 된다(이는 개인의 의견인데, 쓰다보니 프로이트의 무의식 메카니즘과 비슷해졌다). 지킬은 이러한 선악의 끊임없는 갈등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던 사람이다. 지킬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도덕적인 인물로 비춰지면서도, 어찌보면 비윤리적인 욕망을 그 누구보다도 갈망하면서도 이를 최대한으로 누르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약을 마시고 난 이후로 선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악인 '하이드'의 욕망에 쾌감을 느끼면서도 사회윤리에 저촉되는 행동을 했다는 죄책감에 갈등을 멈추지 않는다.
본인의 의식 속에 선과 악의 특성이 있으며, 근본적으로 양쪽 모두를 자신이 가진 성격이라고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이드는 지킬이 외면하려는 존재이다. 세간에서 지킬과 하이드의 관계를 묘사하는데는 많은 표현이 있다. 동전의 양면, 칼의 양날 등. 하지만 이런 비유가 완벽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지킬은 완벽한 선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킬은 선과 악의 공존이었으며, 하이드는 순수한 악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이드가 저지른 범죄를 무마하기 위해 지킬은 온갖 뒷처리를 맡아왔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약을 중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힘을 계속 쓰는 지킬을 과연 악의 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새로움은 믿기 힘들 만큼 기분 좋은것이었다네.
선과 악의 양면성과, 자신의 이중적 생활에 대해 회의감과 수치심을 느낀 지킬은 드디어 악을 분리해내는데 성공한다.
현대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범죄자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개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지적이고 날카로우면서도 반듯하게 생겼을 거라는 사이코패스형 킬러(미디어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특별하게 생기지 않았지만 눈빛이 매섭고 흉흉한 이미지인 수상쩍은 범죄자.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이 소설에서는 지금보다 더한 악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하이드의 외형에 대해 말하자면, 키가 작고 볼품없으며, 못생기고 기형적인 인물이다. 지킬의 주장에 따르면, 여태까지 자신이 악을 누르고 살아오기 위해 노력했으므로 하이드가 작고 호리호리한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애초부터 이 소설에서는 하이드의 외모를 기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열등하고 추악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악은 지양되어야 하는 것, 사람들이 피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가치가 투영되어있으면서도 당대의 고정관념을 녹여내려 했던 시도가 아닌가 싶다. 결국 작가도 악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기본적 본능, 순간적 쾌락을 만족시키는 것 만큼 기분 좋은 것(쾌락)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마지막 챕터만 읽어서 도대체 하이드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간략하게 나온 바로는 성냥팔이 아낙네를 때리고 마부 멱살을 잡고.. 순간의 feeling(emotion과는 다르다)에 충실한 삶인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수단과 방법을 고려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만족시키는 하이드의 행위는, 인간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동물의 행위와 가깝다고 느껴진다. 인간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의 자세한 참고가 필요할 것 같다) 그 행위와 과정에 있어서는 짐승과 가까운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상, 만족의 유예(delay of gratification)와 규칙에의 순응이 필요하다(물론 이 규칙이 합리적이고 옳다는 전제 하에.). 갑자기 생각난건데, 어떻게 하면 지킬은 이런 극단적인 욕망을 가지게 된 것일까. 사회에서의 과도한 압박과 피로? 나중에 이에 대해 생각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하이드로의 변신이 거듭될수록, 하이드의 몸은 커지며 그의 에너지는 점점 커져갔다. 인간이 아닌, 괴물과도 같은 형체였던 하이드가 점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간다는 점에서 지킬이 점점 하이드로서의 가치관이 정신의 일부를 잠식해 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이드의 인격이 점점 교묘해지고 치밀해지면서, 악이 무지의 악에서 영악한 악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나 싶다.
처음에 샀던 소금에 불순물이 섞여 있었고, 그 불순물이 약에 효능을 주었던 것 같네.
이 글을 쓰게 된 주된 이유가 이 대사 때문이었다(항상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포스팅을 하면, 제일 쓰고 싶은 메인 계기를 뒤쪽에 두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동·서양 문화권을 막론하고, 소금은 정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상가에 다녀온 사람에게 소금을 뿌린다든지, 슈퍼내추럴 윈체스터 형제의 솔트앤번이라든지 하는 악을 쫓는 의미로 소금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각 문화의 소금의 의미가 비슷한지 궁금해서, 위키백과를 찾아봤다. https://en.wikipedia.org/wiki/Salt#Usage_in_religion 참고. 고대 이집트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에서는 신을 부르는 제사에 소금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엑소시즘에도 이용이 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소금은 하나의 신성성, 정화와 결합되는 상징물인 것이다.
이렇게 정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소금에 불순물이 섞였다고 한다. 사실 불순물이 섞였다는 주장은 지킬의 가설일 뿐이며, 그 외에 다른 요소가 개입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소금(with 불순물)'이 들어간 약을 통해서, 지킬은 '선+악'에서 순수한 '악'을 분리해낸다. 여기서 개인적으로는, 쫓는 게 아니라 '분리'한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다. 결코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결코 양 극단의 선, 악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악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극단적인 선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지수이다. 만약, '선+악'에서 '선'만을 분리해냈다면? 물론 재미는 없었을 거다. 그랬다면, 선의 결정체인 OO씨가 일상생활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조심하며 사는, 그 나름대로이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었겠지.
한편 약을 만들기 위한 소금은 순수한 소금이 아니라, '불순물'이 섞인 소금이었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남긴다ㅡ 이는 결과적으로 '악'만을 걸러내기에 이른다. 완전한 선을 가진 인간에 대해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또한, 한끝의 실수로, '악'으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방종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비판적인 시선이 작품에서 머무르지 않고, 나 자신에게까지 확장된다.
이에 대해서 쓰고 싶은 내용은 많은데 아직도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불순물이 섞여있는 소금은 악을 하나로 모아 분리를 했으나, 이에 대해 어떠한 지시를 하거나 그 이후의 효과를 제공하지는 않는 것이다. 순수한 악이 분리된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킬은 이 약에 중독되어 하이드로서의 삶을 즐긴다. 결국 선과 악을 가를 수 있어도, 자신의 행동과 미래를 결정하는 건 사람의 의지와 생각 아닐까.
굳이 따지자면 지킬은 훨씬 모순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인간을 제일 잘 대표하는 존재이다. 악이라는 욕망에 대한 본능적 끌림(성악설의 관점이 지나치게 반영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에 중독되는 것이다. 컨닝, 도벽, 색정 등등. 워우. 지금은 극단적인 예시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여튼,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는 것들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은 프로이트의 이론과도, 어떻게 보면 애브젝트의 미학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아직 애브젝트에 대해 내가 언급할 수준이 된 것 같지는 않지만). 선을 지향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어두운 이면에 대한 호기심은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이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가는가. 고딕 소설의 치명적인 시사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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